1번은 고려사절요에 나옵니다.
고려사절요 - 문종 왕자 대각국사 왕후
대각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으로, 송(宋) 철종(哲宗)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자 〈의천〉으로 행세하였다. 문종(文宗)이 하루는 여러 아들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누가 승려가 되어 복전(福田)을 지어 이로움을 더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왕후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제가 세상을 벗어날 뜻이 있으니 오직 임금께서 명하실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자 드디어 스승을 좇아 출가(出家)하여 영통사(靈通寺)에 살았다. 왕후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롭고 배움을 좋아하여, 먼저 『화엄경(華嚴經)』을 업으로 삼고 곧 오교(五敎)에 통달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儒學)도 섭렵하여 정통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니, 우세승통(祐世僧統)이라고 불렀다.
왕후는 송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선종(宣宗) 때에도 여러 번 요청하였으나 재신(宰臣)과 간관(諫官)들이 안 된다고 극언(極言)하였다. 〈선종〉 2년(1085) 4월 왕후는 몰래 제자(弟子) 2인과 더불어 송의 상인(商人) 임녕(林寧)의 배를 타고 떠났다. 왕은 어사(御史) 위계정(魏繼廷) 등에게 명하여 길을 나누어 배를 타고 쫓아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으며, 예빈승(禮賓丞) 정근(鄭僅) 등을 보내 바다를 건너는 일의 안부를 묻게 하였다. 왕후가 〈송에〉 이르자 송 황제는 그를 수공전(垂拱殿)에서 인견(引見)하고 빈객(賓客)의 예로 대접하였으며 총애하여 예우함이 두터웠다. 왕후가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묻기를 요청하자, 조서(詔書)를 내려 주객원외(主客員外) 양걸(楊傑)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강소[吳中] 지역의 여러 사원(寺院)에 이르자 모두 왕신(王臣)과 같이 맞이하고 전송해주었다. 왕이 황제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왕후의〉 환국(還國)을 간청하자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후가 예성강(禮成江)에 이르자 왕은 태후(太后)를 받들고 봉은사(奉恩寺)까지 나와 기다렸는데, 맞이하고 〈궁으로〉 인도하는 의식이 매우 성대하였다. 왕후는 불전(佛典)과 경서(經書) 1,000권(卷)을 바치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둘 수 있기를 아뢰었다. 요(遼)와 송에서 책을 사들여 4,000권에 이를 정도로 많았는데 죄다 간행(刊行)하였으며, 천태종(天台宗)을 처음 열어 국청사(國淸寺)에 두었다.
5번은 지눌스님이 저술한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와 송광사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에 나옵니다.
처음으로 스님이 남류(南遊)하면서 수행의 길에 오르고자 할 때, 동학도반(同學道伴)과 함께 약속하되, “나는 지금부터 깊은 곳에 숨어 향사(香社)를 맺고 전적으로 정혜(定慧)를 닦고자 하니,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 하니, 대중이 말하기를 “지금은 말법(末法)이므로 그렇게 할 시기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이르기를 “시기는 변천하지만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교법(敎法)이 흥왕하거나 쇠퇴한다고 보는 것은 삼승(三乘)인 권학(權學)의 견해일 뿐이어늘, 지자(智者)가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중들은 모두 복종하면서 “옳은 말씀입니다. 뒷날 함께 결사(結社)를 맺으면 반드시 정혜결사(定慧結社)라 이름합시다”라고 하였다. 거조사(居祖寺)에 있을 때 과연 정혜사(定慧社)를 세우고 곧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었으니, 이는 초지(初志)를 이룬 것이다. 그 후 송광사(松廣寺)로 옮겨 결사를 맺고도 역시 정혜결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멀지 않은 곳에 같은 이름(吉祥寺)이 있으므로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아 조계산 수선사라 개칭하였으니, 이름은 비록 다르나 뜻은 다르지 않다. 스님이 한결 같이 정혜에 뜻을 두었던 것이 이와 같았다.